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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속보]차수련 위원장 11월 1일 진술내용

by 선전국 posted Nov 03, 200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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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련 위원장 최후진술

검사가 이번이 4번째 구속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저도 4번이나 '수의'를 입고 이곳에 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먼저, 저는 이곳에 서기까지 왜 제가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2남 4녀의 막내로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겨우 합창반 활동을 했던 것이 다였습니다. 그러나 한양대병원에 입사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일하게 했으며,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수술방은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후 4시부터 오전 8시까지 16시간 밤근무를 힘들게 하면서도 야간근무수당 1500원을 받았으며 밤새내내 수술후 피묻은 기계를 소독하고 닦아야 했고 심지어는 수술방 바닥까지 청소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밤에 일하다 보면 산재 노동자들이 가끔 왔습니다. 저희 병원 근처 성수동은 작은 공장이 많아 손,발이 잘려서 오는 환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보면서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성당에서 알게된 신부님을 통해 진료활동을 권유받게 되었고 거기서 함께 일하던 중 호헌철폐 투쟁이 일어나 서명을 권유받게 되면서 이 일은 나 혼자만 알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 결국 병원내에 있는 후배들에게 서명을 권유하던 중 6.29선언이 터졌고 서울대 병원에 노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울대병원노조가 생긴 것은 한양대병원 직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병원내부의 직원들은 우리병원에도 노동조합이 생기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고, 저는 누군가 할 일이면 나부터 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노동법이 뭔지 생휴, 연차·월차가 뭔지 몰랐습니다. 1년에 5일의 휴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노조 결성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직원들에 의해 노조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때 노동조합에도 민주노조가 있고 그렇지 않은 노조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월동안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싸우다 결국 저는 2대 위원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대학과 병원은 임금이 동일하였는데 대학직원들이 단일호봉제로 바뀌면서 임금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노조는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같이 받고 있던 대학과 똑같이 임금을 맞춰달라고 했으나 병원은 노조파업직전까지 단 한번도 교섭을 하지 않고 오로지 직권중재만 의지한 채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32일간 파업을 하게되었고 결국 저는 구속이 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화를 하지 않은 병원의 책임이 인정되어 벌금형을 받았던 일이었고 두 번째는 신혼 3개월이 되어 임신한 상태에서 신우신염을 앓아 병원에 15일 입원한 뒤에 의사는 한달동안 누워서 절대 안정을 하며 지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퇴원하자 마자 검찰은 노태우정권에서 전노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이에 가입하는 노조에 업무조사와 제 3자 개입 금지 조항을 내걸었고, 대표적으로 저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1년 6개월 수배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첫 돌이 지난 아기를 떼어놓고 자진출두하여 아기가 3일동안 먹지도 않고 울며 지냈습니다.
검찰은 공소장에 대동화학과 녹십자병원에 가서 제가 파업을 주도했다고 공소장에 썼는데 실제로 대동화학에 간 날짜에 저는 32일간 파업으로 성동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는 날이었고 녹십자병원은 이미 폐업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공소가 기각되자 검찰은 다시 현대중공업 파업때 라면과 담요를 준 것과 단지 서울대병원 집회에서 여러 위원장들이 한마디씩 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투쟁하십시요'라고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기소하여 결국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병원은 1년 6개월동안 수배생활을 한 것을 빌미로 무단결근으로 해고를 했고 저는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여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병원은 불복하여 또 다시 집행유예형을 빌미로 당연퇴직으로 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95년 해고된 상태였던 저를 조합원들은 압도적인 지지하에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95년 임금, 단협과 함께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여 결국 해고자복직에 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였으나 병원은 단서조항으로 2년후 복직을 제기하며 남편과 함께 미국에 나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위원장 임기를 1년이나 앞두고 저는 조합원에 대한 책임감으로 차마 떠날 수 없었지만 또 다시 후배들에게 저와 같은 고생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 2년후 복직을 받아들이고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2년동안 미국에 있는 동안 저는 코넬대학의 Visiting fellow 코스를 하면서 어학도 조금씩 늘고 하여 이제 개인적으로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인된 몸이었고 복직을 위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귀국하여 노조에 돌아와보니 병원은 인력감축 40%, 구조조정을 이야기하며 노조는 많은 어려움에 처해있었고 간부들은 병원과의 오랜싸움에서 지쳐있었습니다. 또한 병원은 저에게 복직을 미루며 돈을 대줄테니 다시 유학을 가라고 제안하였으나 저는 오랜 투쟁속에 저 개인의 명예와 조합원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거부하고 복직을 요구하였습니다.
97년 노동조합에서는 복직합의서를 이행하지 않는 병원에 항의하며 상집간부들이 근무시간이후에 로비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고소,고발이었습니다. 이에 위원장이 항의하며 17일간의 단식을 하다가 쓰러지고 결국 제가 물과 소금도 거부한 금식투쟁을 하다 몇차례 쓰러져 이를 지켜본 조합원들이 파업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또 다시 저와 후배 2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병원은 간부들 해고와 대량징계, 조합비 가압류, 간부임금 가압류로 간부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고 월세를 주지 못해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일찍 나오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세 번째 구속입니다.
그러나 병원의 합의각서 불이행이 인정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습니다.
석방 후 병원의 합의각서 불이행에 대해 알려지고 결국 2기 노사정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대표적 사업장으로 한양대병원을 지목하여 노사정위원회에서는 김연준 이사장에게 증인 출석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98임,단협 투쟁을 전개하면서 다시 복직합의를 하였으나 또 다시 병원은 조건을 내걸며 상급단체로 나가서 활동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복직합의후 미국에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부당노동행위 사업장으로 지목된 식칼테러, 똥물새례를 퍼부었던 청구성심병원과 대전성모병원 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이에 병원연맹에서는 미국에 있는 저에게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하여 갈등 끝에 또 한국으로 나와 연맹에서 일하며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IMF가 터진이후 병원 노동자들은 생리휴가, 연월차휴가 반납, 임금삭감을 강요당하였고 가장 힘든 것은 인력문제로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환자의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고 정규직의 노동강도가 강화된 것이었습니다.

지난번 신문에도 보도되었지만 보훈병원에서는 인턴 간호사가 주사를 잘못놓아 환자가 쇽 상태에 빠져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었고 지방공사의료원과 국공립병원은 행자부와 교육부에서 정원을 동결하거나 감축하여 병원장이 인력을 쓰고 싶어도 못쓰는 실정이었습니다.
저는 교육과 의료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병원이 돈벌이병원으로 전락하고 정원이 제한되어 인력을 충원할 수 없으며 의료예산이 4%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올바른 의료를 시행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의사들이 올바른 병원과 의약분업, 의료개혁을 위해 파업에 돌입하였습니다. 검사님은 의사파업과 보건의료노조 파업은 다르다고 했는데 의약분업은 사회적 합의사항입니다. 1968년에 의약분업이 합의되었고 1999년 7월에 시행하기로 한 것을 의사들의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연기되어 2000년에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의료보험수가 문제를 들고 나오자 정부는 이를 보장해주기 위해 4월에는 의료보험 수가를 인상시켰습니다.

저희 보건의료노조 산하 54개 지부가 조정신청을 하였다고 하나 파업전에 32개 병원이 타결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파업이 아니라 타결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들어가도 하루 이틀만에 속속 타결되었습니다. 검찰은 노사자율적으로 타결중인데도 공권력을 이용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하였습니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이해당사자간의 분쟁이 있을 때 조정, 중재를 해서 합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약자에게 칼자루를 휘두르는게 맞는 겁니까?
충북대, 경북대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느냐, 타결내용이 다른 지부보다 훨씬 높으냐 하면 아닙니다. 훨씬 더 낮은 임금, 낮은 조건에서 타결되었습니다. 단지 노동조합에서 농성을 하자마자 간부들을 고소,고발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려 하고 오로지 직원중재 조항을 빌미로 공권력에 의지하려고 하는 사용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IMF시기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모습을 보면 IMF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오히려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고통을 전담하며 못가진자는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저는 우리의 요구를 보면서 잘못되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원은 필수공익사업장이라는 것을 내세워 파업권을 봉쇄하고 불법으로 몰아부쳐 굴종을 강요하고 있으나 저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실정법에 위반된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조금씩 진보해야 하며 역사의 수레바뀌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 속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하고 싶습니다. 잘못된 정부와 사용자를 견제하기 위해 노조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실정법 위반보다 사회정의 차원에서 바라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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